千尺絲綸直下垂(천척사륜직하수) 

一波?動萬波隨 (일파재동만파수) 
夜靜水寒魚不食(야정수한어불식) 
滿船空載月明歸(만선공재월명귀) 

천 자나 되는 긴 낚시줄을 곧게 드리우니 
한 물결이 일어나자 만 물결이 뒤따르네 
밤은 그윽한데 물이 차니 고기도 물지 않네 
빈 배에 허공만 가득 채우고 달빛 받으며 돌아오네 

중국 송 시대의 거사 야부(冶父)가 깨달음을 성취한 도인의 경계를 풀어낸 게송이다. 최근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를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야부의 게송이 눈에 들어왔다. 인터뷰를 앞둔 시점이어서 그랬던지 불현듯 정경희 선배의 모습이 떠올랐는데 그만한 까닭이 있다. ‘첫 인상이 오랜 간다.’ 이 서양속담처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그만큼 첫 인상이 중요하고 평생의 이미지로 남는다는 뜻일 게다. 그렇다. 정 선배에 대한 필자의 인상도 그랬다. 조선시대 선비의 단아하고 강직한 풍모, 비록 속세의 혼탁한 물결에 발을 담그고 있지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탈속의 분위기-그렇게 고정된 이미지가 필자의 머리에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하늘만 쳐다보고 삽니다~ 
각설하고, 정 선배의 여의도 자택(대교아파트)을 찾은 날은 7월 11일, 제법 무더운 오후였다. 한국일보에서 정년퇴임한 지 올해로 10년째, 정 선배의 모습은 중학동 시절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정 선배는 26평의 공간에 혼자 있었다. 아마도 지난해 모친이 돌아가신 뒤로 홀로 남았을 것이다. 속으로 이번 기회에 독신의 이유를 물어보기로 작정했다. 다만 그 질문은 맨 마지막에 하기로 하고. 

“하늘만 쳐다보고 삽니다.” 근황을 묻자 이렇게 말문을 연다. 처음에는 우스개 소리로 흘려 들었지만 차츰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단순한 농담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정 선배는 ‘미디어오늘’의 ‘곧은 소리’에 6년 가까이 매주 칼럼을 쓰고 있다. “칼럼내용에 대해 찬반 양론이 있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자기와 반대되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해서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과 비난의 글을 보낼 때면 정말 답답합니다. 우리 사회의 건전한 비판과 토론문화의 실종이 우려되는 것이지요.” 표정이 갑자기 엄숙해진다. 가벼운 화제로 인터뷰를 시작하려고 했으나 말길을 돌리기가 어렵게 됐다. 

“우리 사회는 지금 두 개의 거대한 적대적 집단이 서로 마주보고 달려가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런 상황은 최근 몇 년간 심화되고 있어요. 과거 박정희 정권 이후 30여 년간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기득권집단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구성하는 새로운 주도세력, 이 두 집단이 서로 원수처럼 싸우고 있습니다. 이들의 반목과 갈등은 우리 역사상 유례없는 사회적 위기를 불러오고 있거든요. 무엇보다 언론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 선배는 작금의 우리 사회가 갈가리 찢겨져 있다고 판단한다. 사회적 통합이 실종됐다는 것이다. “이런 총체적 위기상황을 극복하는 데는 언론인과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정년퇴직 후 언론개혁에 적극 동참하는 까닭을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공익을 위한 여론 끌어내야 
언론은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어떤 주제를 선택하든 적확한 어휘와 논리로 국민에게 올바른 내용을 전달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절대 감정이 개입돼서는 안됩니다. 냉정을 유지하고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에 의지해 기사를 써야 합니다.” 언론에 대한 비판은 곧바로 언론개혁에 대한 소신으로 이어졌다. “언론이 사명을 갖고 위기상황 타파에 앞장서야 합니다. 사회통합을 위해 필요한 여론을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과거 행태에 대한 언론계의 반성이 선행돼야 하지 않을까요.” 정 선배는 우리 사회의 위기는 언론, 특히 외환위기 이후 심화된 과점매체에 의한 여론 장악을 가장 큰 원인으로 꼽고 있다. 물론 그런 주장에 대해 찬반 양론의 시각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기자 정경희’는 아주 균형 잡힌 선배로 필자는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특정사안에 대해서는 너무 한쪽으로 기우는 것 아니냐는 언론계 주위의 시각도 없지 않았다. 긍정 부정의 시각을 떠나서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는데 기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다. 과연 오늘의 기자들은 어디에 서 있는가.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사회에는 지식인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식인이란 끊임없이 사회를 점검하고 공익을 위한 여론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특정한 사안과 주제에 대해 소위 지식인들이 주고 받는 설전을 보면 전혀 지식인답지 않습니다. 지식인은 정의와 진실을 위해 양심을 팔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기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자는 사회의 감시인이자 지식인입니다. 진정한 지식인과 언론인이 어느때보다 필요한 시기입니다.” ‘하늘만 쳐다보고 산다’는 첫 마디의 의미가 어렴풋이 가슴에 와 닿는다. 

대북 송금 비난이 가슴 아파 
무엇보다 정 선배가 가장 가슴 아파한 것은 ‘대북비밀송금사건’에 대한 언론의 보도태도였다. 정 선배도 이 문제를 놓고 고민을 많이 했다고 털어놓는다. 심지어 소련시절 고르바초프의 개방, 개혁정책을 원용, 남북정상회담의 의미를 판단하고 평가했다. 역설적으로 소련의 최대의 적은 개방이었다. 만약 고르바초프가 그런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철의 장막은 건재했을 것이다. 개방이 되면서 소련국민은 서방의 풍요로운 사회를 목격했고 진상을 알게 됐다. 소련제국의 붕괴 당시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변함없는 정 선배의 결론이다. 

“언론이 너나 할 것 없이 국민의 알권리를 내세워 6.15공동선언의 진상을 밝히라고 윽박질렀습니다. 설사 김대중 정부가 돈을 주고 정상회담을 샀다고 쳐 봅시다. 결국은 북한의 개방을 이끌기 위한 방편일진대 왜 모든 언론이 뒤늦게 매도합니까. 그러면 북으로 하여금 철의 장막을 다시 치고 스탈린 체제로 돌아가라고 해야 옳다는 말인가요. 앞으로도 대북정책은 북측이 문호개방의 연장선 위에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도록 도움을 주는 방향에서 추진돼야 합니다. 북한이 과거의 폐쇄체제로 돌아가도록 하는 정부나 언론이야 말로 이적행위를 하는 겁니다. 색깔시비는 우리 체제가 북한보다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지난해 한일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목 터져라 외치던 젊은이들을 보고 우리체제에 대한 자신감을 재인식하게 됐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기자 하겠다 
기자는 보람있는 직업입니다. 내세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그 때 신이 무슨 직업을 택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기자를 택할 것입니다. 정말 어려운 시기에 기자생활을 해왔지만 양심에 비춰 부끄러운 글쓰기는 해본 적이 없다고 자부합니다.” 당연히 한국일보 시절이 지나온 삶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다. 특히 5공 정권 시절 전화와 편지로 격려를 아끼지 않은 수많은 독자들은 평생 잊지 못한다. 내친김에 현역시절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물어봤다. 정경희 선배는 1958년 한국일보 견습 8기로 입사했다. 1993년 12월 31일 정년퇴직 때까지 36년을 중학동에서 보낸 셈이다. 평기자로서는 외신부(현 국제부)와 편집부에서 주로 근무했다. 외신 정치 문화부장, 부국장 겸 주간한국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오랜 기간 일했다. “한국일보가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에요. 그러니 이력서를 써 볼 기회가 없었죠.” 대학진학을 앞두고 무엇을 전공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사회학이냐 아니면 사학이냐, 그러다가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에 진학했다. 졸업 무렵 정 선배도 취업문제에 부딪쳤다. 당시 시험을 치고 들어갈 수 있는 직장은 은행 아니면 한국일보밖에 없었다. 

“사실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 별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부친께서 광복직후 전주에서 ‘전라민보’의 사장으로 일간지를 발행하셨습니다. 제 기억에 전라민보는 여러 정당이 힘을 모아 만든 신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친이 제 앞길에 영향을 준 것도 사실입니다.” 정 선배는 퇴직 후에도 언론현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미디어오늘’의 고정칼럼 때문에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다고 말한다. 주제선택이 가장 큰 고민이다. “하루 24시간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매주 한번이지만 원고를 보내고 나면 짐을 벗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소송 때 언론의 무관심에 서운 
언젠가 작가 최인호 씨와 주고받은 대화가 생각난다. 맥주 한 잔을 곁들인 식사를 하면서 필자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최인호 씨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기자들은 하루 하루가 마감의 연속인데 그 스트레스를 어떻게 감당하지요?” “최 선생님도 장기간 신문연재 소설을 써왔으니 짐작하실 텐데요.” “그렇긴 해도 스트레스의 강도가 아주 다르죠.” 마감시간은 기자의 숙명이다. 아니 전생의 업이다. 정 선배는 퇴직 후 오히려 긴장과 스트레스의 강도가 더욱 높아졌다고 말한다. 조직의 울타리에 있을 때와는 달리 모든 것을 혼자 감내해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정 선배는 한나라당의 소송사건을 예로 들었다. 한나라당은 “제16대 대선기간 신문칼럼을 통해 이회창후보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정 선배를 상대로 5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소송은 지난 2월 기각됐지만 정 선배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언론계의 외면을 무척 서운해 했다. “한국일보와 한겨레를 제외하고는 어떤 매체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언론에 종사했던 한 사람으로서 정말 섭섭했습니다.” 

‘선배언론인을 찾아서’라는 문패답지 않게 대화가 너무 진지하고 무겁게 흘러갔다. 정 선배를 만나기 전까지 이 같은 인터뷰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야부의 게송이 그려내는 정경처럼 오랜만에 선후배가 만나 이런저런 살아가는 얘기를 나눠보겠다는 생각은 여지 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정 선배가 영원한 기자였기 때문이리라. 

5.18 이후 취미인 음악감상도 끊어 
정 선배는 매주 월요일을 손꼽아 기다린다. 일주일의 고민이 끝나는 동시에 유일한 취미를 즐기는 날이다. 오전 10시 팩스로 원고를 보내고 나면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해방감을 만끽한다. 오후엔 산책에 나선다. 장소는 여의도공원이다. 30분~1시간 가량 산책을 즐긴다. 산책이 정신과 육체의 피로를 푸는 유일한 통로다. 집 근처에 울창한 숲이 있다는 사실이 정말 고맙다. 원래 그의 유일한 취미는 음악감상이었다. 1970년대 한동안 월급의 상당부분을 털어 클래식 원판을 구입했다. 응접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레코드는 약 700~800장. 그 옆에 오래된, 그야말로 고색창연한 일제 빅터 전축이 자리잡고 있다. 70년대만 해도 장안의 명물이었을 것이라는 게 정 선배의 설명이다. 전축은 소리를 멈춘 지 오래다. 음악감상도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끊었다. 민족사의 엄청난 비극 앞에-원래 술, 담배도 안 하지만-음주가무는 당치도 않은 행위였다. 그 뒤부터 음악도 잊고 살고 있다. 

그래서 물었다. 어떤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드느냐고. 한때 즐겨 들었던 곡은 18세기 이탈리아 작곡가 페르골레지의 라틴어 성가 ‘슬픔의 성모’였다. “한 인간이자 어머니로서 성모 마리아가 아들 예수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겪은 심적 고통과 갈등을 고백하고 하느님에게 평화를 간구하는 내용을 담은 성가입니다.” 

조선총독부 철거 제안 
정작 정 선배는 한국일보에서 물러난 다음 고려시대 연구를 하려고 나름대로 야심찬 계획을 세워놓았다. 고려시대를 서구중세의 분권사회 내지는 봉권사회로 파악하고 있던 정 선배는 이런 이론적 틀을 토대로 고려사를 다시 정리해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모친이 몸져 누우면서 병구완을 하느라 미뤄놓았다. 지금도 역사학보, 한국사연구 등 5개 학회지를 집에서 받아보고 있다. 하지만 학보를 다 읽기도 힘들다. 정 선배의 연구결실은 1990년 ‘한국고대사회문화연구’라는 단행본으로 나왔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정치이념으로 삼국의 사회를 조명한 이 저서에서 정 선배는 ‘남한의 신라중심, 북한의 고구려중심의 역사서술은 백제중심의 서술로 바뀌어 한다’고 주장한다. 백제가 유교사상을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고도로 발달된 유교적 관료사회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정 선배는 이듬해 ‘역사산책’ 4월호에 ‘고구려는 과연 군사강국이었나’를 주제로 논문을 게재, 고구려의 군사적 한계를 지적하기도 했다. 

기자로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무엇일까. 정 선배는 80년대 ‘일본해 표기는 역사적으로도 잘못’이라고 지적한 칼럼과 90년대 초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의 당위성’에 대해 쓴 여러 편의 사설과 칼럼을 우선 들었다. 김영삼 정부 초기 총독부 건물 철거의 아이디어를 주무 장관에게 제시한 사람도 정 선배로 알려져 있다. 1993년 4월에 쓴 칼럼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총독부 건물을 헐어 없앤다고 국권상실 35년의 치욕을 잊을 사람은 없다. 철저한 청산이 있고서야 창조가 가능하다. 총독부의 이전 복원이란 피학대성 이상심리의 발상법이다. 막대한 예산을 퍼부어 총독부를 다시 짓겠다니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총독부 건물의 이전 복원 방법을 검토하라는 김영삼 대통령 지시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칼럼이었다. 

“기자에게는 의제설정의 특권이 있습니다. 왕조시대에는 임금의 전유물이었던 특권을 기자들이 갖고 있는 것입니다. 기자들은 그 특권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퇴직 후에는 본격적으로 언론개혁에 동참하면서 ‘여론의 과점지배’라는 어휘를 처음 사용했다. 정 선배에게 제3회 위암 언론상(1993년), 제1회 송건호 언론상(2002년)이 돌아간 것은 당연했다. 

독신주의자인가 
후배를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기자는 옳고 그름을 떠나 결코 패거리에 가담해서는 안 됩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민해야 합니다. 기자는 정말 고통스러운 직업입니다.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그런 후배들이 많이 나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제 부친은 한국전쟁 중 남로당에 의해 비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 이후 공산당을 미워해야 할 것인가, 그러면 통일은 무엇인가 하는 고민을 끊임없이 해왔습니다. 하루라도 긴장을 풀고 살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신문기자는 무한책임을 요구하는 직업입니다. 독자를 상대로 대화를 해야 하는 특성 때문입니다.” 

“선배님은 독신주의자십니까?”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족을 달아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10대 때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파우스트의 마지막 말이 무엇인지 혹시 기억납니까. ‘아! 다시 젊어졌으면’이지요. 근래에 와서 이 말의 참뜻을 깨닫게 됐습니다. 요즘 우리 젊은이들을 보면 남자는 모두가 미남이고 여자는 모두가 미녀입니다. 젊음이란 그렇게도 아름다운 것인가 봅니다.” 



[자료출처 - 한국언론재단]